시간(時間, Time)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자연학>에서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은 운동의 전후에서의 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이라는 것은 사물의 변화를 말하고, 그 변화의 수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에게 있어 시간이란 운동이나 변화가 일어나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제논은 소위 날아가는 화살의 패러독스에 대해 말한다. 즉 “날아가는 화살은 일순간 정지해 있다. 정지하고 있는 화살을 아무리 모아도 화살은 날아가지 못한다.” 제논은 화살이 날아가는 운동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 화살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어딘지 결함이 존재한다. 그의 주장에 있어 ‘일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순간을 시간을 무한으로 짧게 자른 경우 그 하나를 일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무한으로 짧게 자른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의가 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인류는 되풀이되는 천체의 움직이나 자연의 현상으로 인해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해는 하늘에서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지게 된다. 이렇듯 태양의 움직임으로 우리는 ‘하루’라는 시간적 개념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
밤에 뜨는 달의 모습을 보면 매일 다르게 나타난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그리고 그믐달이 되는 동안 30일 정도가 지나게 되고 우리는 그것으로 한 달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피고 더운 여름이 지나 단풍이 드는 가을이 된 후 하얀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꽃피는 봄이 되는 것으로 일 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인류는 천체의 움직임과 자연의 현상으로 시간의 개념을 확실히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기계인 시계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태양은 지고 나면 다시 떠오르고, 보름달은 1개월 후 다시 제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천체의 운행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 천체의 운행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시간은 순환하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가 새벽이 되기 바로 직전 동쪽 지평선에서 올라올 때를 1년의 시작으로 정했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집트 사람들에게 있어 계절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홍수가 되는 시기인 나일강이 범람하는 것을 예측하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 씨를 뿌리는 시기를 정해야 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누고, 각각 12개로 구별하여 1시간이라는 길이를 정했다. 그들의 생활의 편리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낮과 밤의 길이는 달랐다. 여름의 경우 낮의 길이는 길고, 겨울의 경우에는 밤의 길이가 길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 낮의 길이는 여름이 훨씬 길기 때문에, 겨울의 1시간보다 여름의 1시간이 더 길었다.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1시간은 현대 우리들의 1시간과 같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계절에 따라 그 길이가 변하는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상대적 길이의 1시간이 보다 정확한 절대적인 시간으로 정해져 갔다.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기계인 시계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게 된다. 중세까지 시계는 부정확한 해시계나 물시계가 전부였다. 매일 똑같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이탈리아의 갈릴레이였다. 뉴턴이전 역학의 체계는 바로 갈릴레이에 의해 성립된다.
갈릴레이는 어느 날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움직임을 보고 그 흔들림이 클 때의 왕복시간과 흔들림이 작을 때의 왕복시간이 같다는 것을 자신의 맥박을 측정하며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사실 “진자의 주기는 그 질량과 진폭에 무관하다”는 진자의 등시성이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이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성질은 시간의 절대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는 시계추라는 것을 발명하여 소위 정확한 ‘진자시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로 인해 인류는 시간을 천체의 운행이나 자연의 변화와 상관없이 아주 정확한 간격을 가진 시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진자시계가 인류에게 보급됨으로써 시간이라는 것은 측정할 때마다 변하는 것이 아닌 항상 일정한 길이를 가진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호이겐스가 만든 진자시계는 오차가 하루에 10초 정도였는데, 그 전의 시계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진자시계의 등장은 우리에게 시간을 더 세밀히 쪼깬 ‘분’이나 ‘초’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1927년에 이르러 소위 ‘수정시계’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수정의 얇은 판에 전압을 걸 때 일어나는 규칙적인 진동을 진자대신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 오차는 1개월에 약 15초 정도였다. 1955년에는 ‘세슘 원자시계’가 발명되었는데 이는 세슘 원자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특정한 전파의 진동을 진자나 수정 대신 이용하였다. 현재의 ‘1초’의 정의는 이 원자시계의 1초에 바탕을 둔다. 최신의 원자시계는 그 정확도가 3,000만년에 1초 정도이다. 이것보다 더 높은 정확도를 가진 시계는 우주 공간에 있는 ‘펄사’이다. 펄사는 극도로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천체인데 그 오차는 1억년에 1초 정도 된다.
갈릴레이가 죽던 해 태어난 뉴턴에 의해 인류는 역사적인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우주 공간의 모든 물체는 운동하고 있고 그러한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했던 뉴턴은 그 운동의 측정을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그에게 있어 그 기준은 바로 시간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책이라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이후 인류는 그의 이러한 패러다임에 속박되고 만다. 뉴턴의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대적인, 참된 수학적인 시간은 그 스스로 그것의 본성으로부터 외계의 어느 것과도 무관하게 균일하게 흐르는데 이것에 대한 다른 이름을 지속이라고 한다.”
인류의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아이디어 의해 우리는 이 절대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에 갇혀버리고 만다.
- 그가 생각한 절대 시간이란 물체가 있든 없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전적으로 일정한 템포로 흐르는 것이 것이었다.
우주에 시간을 측정하는 시계가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도 뉴턴은 시간은 여전히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시계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이 완전히 없어져 오직 공간만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계속 흐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이러한 뉴턴의 생각에 반기를 든 사람도 있다.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란 복수의 사물의 순서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과는 상관없이 흐르는 절대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뉴턴의 엄청난 업적에 밀려 가려지게 되고 만다. 이후 인류는 근대과학의 발전과 함께 시간에 대한 절대성이라는 개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뉴턴의 생각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되어갔으며 이후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뉴턴의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약 250년이 지난 후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국 직원으로 일하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05년 그리 알려지지 않은 학술지에 논문 하나를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당시 지구 위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시간이라는 개념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는 논문에서 “운동하는 시계의 진행은 느려진다. 운동의 속도가 빛의 빠르기에 접근하면 시간의 지연은 강해지고, 빛의 빠르기에 도달하면 시간은 멈춘다.”라는 당시 상식하고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이 논문이 처음 나왔을 때 당시 이 주장에 관심을 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50년 동안 인류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뉴턴의 패러다임은 이 논문으로 무너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은 시간을 기록한다는 뉴턴의 절대시간을 철저히 부정했다. 이로 인해 인류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개념은 혁명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계산을 해보면 시속 200km로 달리는 고속 열차의 시계는 기차역에 정지해 있는 시계에 비해 1초당 100조 분의 2초가량 늦어진다. 시속 1,0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경우에는 1초당 100조 분의 1초 정도 늦어진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론을 발전시켜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였는데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시간은 운동하는 관찰자뿐만 아니라 중력에 의해서도 느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지구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중력은 약해진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해발 8,848m인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는 바다표면인 해발 0m에 놓인 시계에 비해 100년당 300분의 1초가량 빨리 가는 것으로 계산된다.
이렇듯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뉴턴이 지배하던 절대시공간의 개념에 혁명을 가져다주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뉴턴의 패러다임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바탕을 둔 패러다임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주의 개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미래에 또다시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올지 알 수는 없다.
시간에는 뉴턴의 절대주의 역학체계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와 미래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계 밖에서 발견된 알지 못하는 행성의 공전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 행성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고 있지 못하며, 만약 이 영화필름이 중간위치에 감긴 상태로 놓여있다고 할 때 이 영화의 재생 방향을 모를 경우 어떻게 될까?
이 영화필름을 어느 한쪽 방향으로 재생하면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행성의 영상이 나오고, 다른 쪽 방향으로 재생하면 왼쪽으로 회전하는 행성의 영상이 나온다고 하자. 어느 쪽 방향으로 필름을 돌려도 어떤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느 쪽이 과거이고 어느 쪽이 미래인 것일까?
뉴턴의 역학은 시간의 어느 쪽이 과거이고, 어느 쪽이 미래인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영원히 나의 아버지일 뿐 나의 아들이 되지는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떤 물리 법칙이 시간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주의 시작과 진화와 관계되는 법칙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과거와 미래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과거가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깨진 컵은 다시 되돌아가지 못한다. 기울어진 경사면을 굴러가다가 편평한 바닥에 이르러 어느 정도 가다 멈춘 공이 다시 방향을 반대로 바꾸어 경사면을 거꾸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우리들 또한 시간과 더불어 늙어갈 뿐,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젊어져 아기가 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시간적으로 역전할 수 없는 과정을 ‘비가역과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구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비가역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가역과정으로 인해 우리는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를 영국의 물리학자 에딩턴은 시간의 방향성을 소위 ‘시간의 화살’이라고 표현했다. 뉴턴의 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에는 정해진 방향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시간의 화살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간의 화살 (時間の矢, Arrow of Time)
1. 심리적/지각적 시간의 화살
- 정신적 화살은 자신의 지각이 알려진 과거에서 알려지지 않은 미래로의 지속적인 움직임이라는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현상에는 기억 (과거는 기억하지만 미래는 기억하지 못함)과 의지(volition) (미래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함)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시간의 인과적 화살의 결과로, 외부 세계와 뇌 사이에 점점 더 많은 상관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과거의 사건(미래의 사건은 아님)이 현재 기억의 원인이 되고(상관관계와 시간의 화살(correlation and arrow of time) 참조), 현재의 의지들과 행동들이 미래의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적절한 정의에 따라 시스템과 주변 환경 간의 상관관계와 전반적인 복잡성의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과 함께 모두 증가한다.
2.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
- 시간의 화살은 시간의 "단방향" 또는 "비대칭성"이다.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은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해 제공되는데, 이는 고립된 계에서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엔트로피는 미시적 무질서의 척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제2법칙은 고립된 계에서 시간이 질서의 양에 대해 비대칭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스템이 시간이 지날수록 통계적으로 더 무질서해진다.
3.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
-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은 우주의 팽창 방향을 가리킨다. 열역학적 화살은 열역학적 자유 에너지(thermodynamic free energy)의 양이 무시할 수 있게 되면서 우주가 열죽음(Big Chill)를 향해 가고 있다는 열역학적 화살(thermodynamic arrow)와 연결될 수 있다. 그 대신에, 중력이 모든 것을 다시 대함몰로 끌어당기면서 이 화살이 반전되는 우주 진화에서는 그것이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의 한 인공물일 수 있다.
4. 복사적 시간의 화살
-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은 우주의 팽창 방향을 가리킨다. 열역학적 화살은 열역학적 자유 에너지(thermodynamic free energy)의 양이 무시할 수 있게 되면서 우주가 열죽음(Big Chill)를 향해 가고 있다는 열역학적 화살(thermodynamic arrow)와 연결될 수 있다. 그 대신에, 중력이 모든 것을 다시 대함몰로 끌어당기면서 이 화살이 반전되는 우주 진화에서는 그것이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의 한 인공물일 수 있다.
5. 인과적 시간의 화살
-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 인과적 사건은 원인이 되거나 영향을 미치는 사건보다 먼저 발생한다. 예를 들어, 출산은 성공적인 임신에 뒤따르는 것이지 그 반대의 경우가 아니다. 따라서 인과관계는 시간의 화살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6. 양자 시간의 화살
- 양자 진화는 시간-대칭적(비상대론적 근사법에서의 슈뢰딩거 방정식 같은) 운동 방정식들과 또한 시간-비가역적 과정인 파동 함수 붕괴에 의해 지배되며, 이것은 실제(코펜하겐 해석의 양자역학에 의해서)이거나 또는 외견상으로만(다세계 해석과 관계적 양자역학 해석에 의해서) 그렇다.
7. 입자 물리학 (약한) 시간의 화살
- 약한 핵력과 관련된 특정 아원자 상호 작용은 반전성과 전하 켤레의 보존을 모두 위반하지만,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한 예는 케이온 붕괴이다. CPT 정리에 따르면 이것은 또한 시간-비가역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므로 어떤 시간의 화살을 설정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초기 우주의 물질 생성을 담당해야 한다.
시간의 화살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비가역진인 변화가 생기는 원리는 바로 수많은 원자나 분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연구하였다. 볼츠만은 그 당시에는 증명되어 있지 않은 원자의 존재를 믿고 비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원인을 탐구했다. 그는 원자들의 분산 상태를 시간의 개념과 더불어 고민했다.
엔트로피(エントロピー, Entropy)
볼츠만은 원자들의 분산 상태를 수학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 그의 정의에 따르면 입자의 배치가 고르게 되어 있다면 엔트로피가 낮다고 하였고, 입자의 배치가 분산되어 있다면 엔트로피가 높다고 계산하였다.
예를 들어 처음에 커피만 있는 잔에 우유가 섞이게 된다면, 섞이지 않은 우유의 경우 엔트로피가 낮고, 우유에 커피가 섞인 이후에는 엔트로피가 높아진다. 커피가 우유에 섞인 이후 다시 우유에서 커피가 섞이게 되지 않은 상태로는 돌아올 수 없다.
즉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에서 낮은 상태로 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의 생성과 진화는 바로 이러한 엔트로피와 관계된다. 우주는 엔트로피가 점점 증가하는 상태로 변해갈 뿐이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소위 ‘시간의 화살’의 원인은 바로 이 엔트로피 증가원리에 따른다. 우주 공간에 있어 시간은 이렇듯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엔트로피 이해
엔트로피라는 용어는 1865년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인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ph Julius Emanuel Clausius)가 처음 고안해 냈다. 이 말은 그리스어 'energie + trope(turning) + y'의 합성어로부터 유래된 것인데 '에너지 변화'를 뜻한다.
엔트로피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가 있다.
간단히 우리의 방을 예로 들어보자. 방을 청소하거나 물건을 정리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고 일주일 정도, 그냥 내버려 둬 보자. 일주일 뒤 심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의 방은 당연히 어질러져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다. 너무 쉽지 않은가? 당연히 어질러지는 게 열역학 제2법칙이라니
우리가 에너지를 투입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방은 무질서하게 어질러지게 되어있다. 방은 스스로 깨끗해지지 않고, 널브러진 옷가지들은 스스로 정리되지 않는다. 내가 하든, 부모님이 하든, 로봇 청소기가 하든 누군가는 에너지를 투입하여 방바닥을 쓸고 닦아야 하고, 널브러진 옷을 개서 옷장에 넣어야 한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거슬러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생기고 정리가 된다.(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활동 또한 어딘가에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이 정도만 이해하자)
'어질러짐', '더러움', '널브러진 옷가지들' 등이 바로 '엔트로피'다. 자연스러움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엔트로피는 이렇게 늘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뜨겁게 조리된 음식은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식고, 더 오래 두면 상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알고 있는 현상들은 열역학 법칙으로 설명이 된다.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의 이치와 삶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세상을 보는 화질을 보다 선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엔트로피를 알아야 하고, 어렵겠지만 이해하여 우리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자연의 이치와 삶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세상을 보는 화질을 보다 선명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엔트로피는 고립된 계(세상, 환경 등)에서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유일하게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는 데, 고립되지 않은 개방된 상태일 경우다. 이 개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생명체의 활동'이다.
사람을 포함한 생명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에너지(산소, 음식 등)를 흡수하여 얻은 자원을 에너지로 전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 심지어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에너지를 소비한다. 에너지 투입 없이 이렇게 계속 소비만 하다간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평형 상태에 이르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 즉, 우리 인간은 열역학 제2법칙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줄여나가며, 질서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립된' 상태, 즉 이 세상과 더 이상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는 상태,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평형상태에 이르게 될 때를 말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 환경의 소중함을 곧 잘 잊고 산다. 너무나도 당연히 태양은 항상 하늘에 떠있고,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공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외부의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투입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삶 다양한 곳에서 엔트로피를 찾아보고 적용시켜 보자.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늘어나는 체중은 어떨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체중이 느는 게 자연스러운가? 체중이 감소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체중이 느는 게 자연스럽다.
체중이 느는 것을 엔트로피가 증가했다로 이해할 수 있다. 엔트로피를 감소시켜야 한다. 가만히 뒀다간 엔트로피가 극대화되는 상황, 즉 평형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기 위해 우리는 '운동'이라는 에너지를 투입할 수 있다. 운동을 통해 체중을 감소시킬 수 있고, 체중이 감소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감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운동을 해도,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그 변화를 즉각적으로 깨닫기는 어렵다. 하지만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운동이라는 에너지를 투입하지 않으면 엔트로피(체중)는 늘어만 갈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평범한 삶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이 세상의 소중함에 대해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과 함께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활동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무엇일까? 살펴본 바와 같이 시간의 개념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떠한 새로운 개념의 시간이 나올지 알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 있는 이 위치에서 시간에 대해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에 대한 정확한 답은 인류의 한계밖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세계는 우리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완전한 답을 찾고자 함은 그 열정에서 멈추어야 할 뿐 이 그 이상은 욕심일 뿐이다.
p.s. 시간의 방향은 바꿀 수 없지만 속도는 조절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에 대한 인식과 속도 조절에 대한 인지는 결국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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