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 (Lulu Miller)

코로네 2025. 1. 7. 07:00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 소파에 앉아 시리얼을 먹다가 불현듯 어떤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것에 대해 흥분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메일 마지막에 겨우 키보드 네 번 더 누르는 수고를 안 하려고 머리글자 하나만으로 서명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를 짜증나게 하는지 모른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혼돈이 그 사람을 집어삼킬 것이다.

혼돈은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나 질주하는 자동차, 총알 하나를 거느리고 밖에서 치고 들어가 그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고,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는 그 사람의 몸속 세포들과 함께 안에서 박차고 나와 그를 해체해버릴 수도 있다. 혼돈은 당신의 화초를 썩어 물러지게 하고, 당신의 개를 죽이고, 당신의 자전거를 녹슬게 할 것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부식시키고,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무너뜨리고, 당신이 간신히 쌓아올린 모든 성스러운 장소를 폐허로 만들 것이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06년 어느 봄날, 팔자수염을 기른 어느 키 큰 미국인이 감히 우리의 주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 여러 방면에서 혼돈과 싸우는 것은 그의 본업이기도 했다. 그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의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하는 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분류학자였다. 그리고 생명의 나무가 완성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혀질 거라고 했다. 그의 전문 분야는 어류로, 그는 새로운 종을 찾아 전 지구를 항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그 새로운 종들이 자연에 숨겨진 청사진에 관해 더 많은 걸 알려주는 실마리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 룰루 밀러가 자신의 삶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 에세이입니다.
 
밀러는 엄격한 과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신경성에 시달렸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삶의 의미를 잃어가던 중, 어류 분류학자인 조던의 삶에 주목하게 됩니다.
 
조던은 자연재해로 수집한 표본이 파괴되고, 가족을 잃는 등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혼돈에 굴복하지 않고 생명 분류에 매진했습니다.
 
밀러는 그의 삶을 추적하며, 조던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기 위해 노력한 과정그의 분류 체계가 가진 한계를 조명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식그로 인한 오류를 성찰하며, 삶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또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철학적 고찰이 어우러져 과학과 인간 경험의 교차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은 과학, 역사, 철학, 자서전적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로, 인간이 부여하는 질서의 취약성자연의 복잡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특히, '물고기'라는 분류 자체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하며, 생명체를 분류하는 기존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이 책은 과학의 한계와 인간의 인식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과학과 인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삶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프롤로그

 

1.별에 머리를 담근 소년

 

2. 어느 섬의 선지자

 

“인간은 [어류와] 그를 구별해주는 도덕적·지적 재능을 활용할 수도 있고 남용할 수도 있다. (…)
인간은 자기가 속한 유형 중 가장 낮은 위치까지 가라앉을 수도 있고, 영적인 높이로 올라갈 수도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룰루 밀러

 

3. 신이 없는 막간극

 

4. 꼬리를 좇다

 
이는 정확히 그가 자신의 물고기들에게서 밝혀내려고 애쓰던 것―특징들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 특정한 물리적 속성들이 진화적 관계에 관한 실마리들을 어떻게 드러내주는지―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을 때도 그러한 충동을 떨쳐내지 못했던 것 같다.

데이비드는 회고록에서 모든 자식들 가운데 특히 바버라를 “가장 상냥하고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어여쁘고 가장 사랑스럽다”고 함으로써 부모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편애라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유감을 품은 상대는 손쉬운 표적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손쉬운 표적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허술한 사고, “진실이 아니란 걸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을 믿으려 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엄청난 고통”을 초래한다고 그는 썼다. 바꿔 말하면 헛된 희망을 품는 뇌, 그러한 상상의 비약에 취약한 뇌가 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유리단지에 담긴 기원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우리는 전쟁,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운송 수단인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캠퍼스로 걸어 나와 내 앞에서 아름답게 나부끼는 오렌지나무 잎들을 보자 그 관념들이 바람에 날려 증발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의자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무들도. 나뭇잎들도. 그리고 사랑도!

이 세계에는 실재인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름을 붙여주지 않아도 실재인 것들이. 어떤 분류학자가 어떤 물고기 위로 걸어가다가 그 물고기를 집어 들고 “물고기”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물고기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이름이 있든 없든 물고기는 여전히 물고기인데….
맞지? 맞겠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6. 박살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여기는 바로 그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들이 올 자리다.
모든 곳에 물고기들이 있었다. 바닥 위 모든 곳에 유리 파편이 흩뿌려져 있었다.

나라면 이 지점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신성이 훼손되고, 꿈이 박살 났으며, 수십 년 동안 끈기 있게 해온 일이 헛수고로 돌아갔다면, 나라면 지하실로 내려가 패배를 인정했을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 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다시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 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렸다. 이토록 억눌리지 않는 불굴의 끈기는 어쩌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그건 미친 짓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선에 대한 믿음을, 별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류의 가슴속에는 존재하는 따뜻함에 대한 믿음을 조용히 실행에 옮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신뢰 비슷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는 시카고로 옮겨 갔다. 친구 헤더가 몇 주 동안은 자기 집 남는 방에서 지내도 되니 거기서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친절한 제안이었다. 나는 시카고가 좋았다. 시카고의 추위가, 시카고의 익명성이. 나는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탄산화 생성물이 약간 포함되어 있는 듯한 까끌까끌한 보도를 따라 걸었다. 나는 폴짝 뛰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람둥이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 우주적 정의가 실행되는 대상이 아니라, 고향에 행복한 가정이 있는 사람이.

그러나 헤더가 남자친구와 시내로 외출한 밤, 도시의 자주색 불빛이 창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그 모든 것의 현실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내 인생에 생긴 공백을, 내가 품은 희망의 빛이 나를 더 따뜻이 데워줄수록 점점 더 넓어지고 차가워지기만 하는 그 공백을 말이다.

그래서였다. 나는 절박했다. 단순하게 말하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책에서, 망해버린 사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는 일을 정당화하는 그 정확한 문장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는 절박했다.
 

7.  파괴되지 않는 것

 
데이비드가 마술적 사고 탓으로 돌린 것들 중 몇 가지만 꼽자면 고통, 병, 무지, 전쟁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 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심지어 절제에 관한 에세이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왜 그토록 약에 반대했을까? 그건 약이 사람을 실제보다 더 강력하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약이 “신경계가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알코올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는 몸이 차가울 때도 따뜻하게 느끼도록 하고, 아무 근거 없이 기분 좋아지게 하며, 인격 수양의 핵심을 차지하는 제한과 자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게 한다.”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은 자기 발전에 대한 저주라는 것이다. 자신을 정체시키고 자기 발달을 저해하고 도덕적으로 미숙하게 만드는 길이자 멍청이가 되는 지름길이다.

이런 게 정말 그의 세계관이라면, 그가 그렇게 자기 과신을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집요함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모든 게 사라지고 부서지고 희망이라곤 없는 최악의 날에조차 어떻게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나가게 한 것일까?

마침내 나는 가장 유의미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절망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작고 검은 책이다. 그 책에서 데이비드는 과학적 세계관이 골치 아픈 점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할 때 그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허망함뿐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우리가 붙인 불은 숯을 남기고 죽는다. 우리가 지은 성들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다.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사막의 모래만 남긴다. (…)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 생명의 과정을 묘사하려면 기운 빠지게 하는 은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데이비드는 청교도답게 손을 게으름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권한다. “활동적인 야외 생활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 그는 우리 몸이 일으키는 전기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쓴 한 강의 요강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행하고, 돕고,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정복하고, 실제로 실행하고, 스스로 활동하는 데서 온다.” 내 생각에는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요점 같다. 여정을 즐기고 작은 것들을 음미하라고 말이다. 복숭아의 “감미로운” 맛, 열대어의 “호화로운” 색깔, “전사가 느끼는 준엄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운동 후 쇄도하는 쾌감 등.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당신이 밟고 선 그 땅뙈기가 이 세상에서, 아니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가장 달콤한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희망이 없다”라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인용한 뒤, 분발을 요구하는 ‘카르페 디엠’의 구호를외치며 독자들을 배웅한다. “그 어디에도 바로 여기, 지금, 오늘만큼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푸르고 햇빛이 밝고 그늘이 반갑게 맞이해주는 곳은 없다.”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흠”이 다여서 나는 맥이 좀 빠졌지만, 다음 날 오후 이메일을 통해 좀 더 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한 그 이야기 말이야.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정교한 뭔가를 쌓아 올렸다가… 그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목격한 그 사람… 그 사람은 계속 나아갈 의지를 어디서 다시 찾았을까 하는 그 질문. 계속 가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계속 가게 만드는, 모든 사람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그것을 카프카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고 불렀어. 파괴되지 않는 것은 낙관주의와는 전혀 무관해. 낙관주의에 비하면 훨씬 더 심오하고 자의식은 훨씬 덜하지. 우리는 그 파괴되지 않는 것을 온갖 종류의 다른 상징과 희망과 야심 등으로 가리고 있어. 이런 상징과 희망과 야심은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인정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음… 만약 그 모든 잉여를 제거한다면(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파괴되지 않는 그것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일단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카프카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그는 우리가 파괴되지 않는 것을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해주지 않아), 그것은 실제로 우리를 찢어발기고 파괴할 수도 있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경이로운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비현실적인 목표를 향해 밀고 나아가는 것이 미친 짓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은 단지 내가 그것을 거역한다면 나를 부숴버리겠다고만 약속할 뿐이다.

그 증거는 긴 발췌문 속에 묻혀 있었다. 지진이 있고 겨우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샌프란시스코가 입은 피해의 규모를 조사하려 애쓰고 있을 때 데이비드 본인이 쓴 개인적인 에세이○에서 발췌한 글이었다.

○ “Life’s Enthusiasms,” Beacon Press, 1906.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창조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노력해서 이룬 결과가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엄청난 규모의 재앙 앞에서 그렇게 푸념하지 않는 인간을 만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평범한 한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토록 희망차고, 그토록 용감하며, 그토록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은 그전엔 결코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람이고,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불에 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 지진과 화재가 준 교훈이다. 그가 지은 집은 무너지기 쉬운 카드로 지은 집이지만, 그는 집 밖에 서 있고 다시 집을 지을 수 있다.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도시가 되는 것이다. 도시란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사람은 영원히 자신이 창조한 것들보다 높이 올라가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보다 더 위대하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 분발을 요구하는 투쟁의 권유인가.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로이자, 어깨를 움켜쥐는 손길인가. 그런데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 그가 쓴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도 그 문제를 발견할 것이다.

그 진주알을 만든 최초의 작은 모래알 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사악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그가 경고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 자기 경력을 바쳐 맞서 싸워왔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자,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했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이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그조차도 절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지지 않으려면 그 거짓말이 진실이기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8. 기만에 대하여

나는 도덕에 관한 나의 판단은 잠시 보류해두고 전문가들은 이 문제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기기만이 데이비드와 내 아버지가 경고한 것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 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 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1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2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연구자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반면 그토록 칭송받던 정확한 인식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어떨까? 짐작했겠지만 그들은 병적인 수준의 우울증에 걸렸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힘들어했고, 좌절을 겪은 뒤에는 회복이 더 어려웠으며,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현실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취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심리치료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 말이다. 많은 치료사들이 “스토리 에디팅” 또는 “리프레이밍reframing”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환자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긍정적인 빛으로 물들이도록 부드럽게 유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핵심은 자기기만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가 밝혀낸바, 극단적 부인이나 기만은 오히려 적응에 해롭다고 나타났다. 그러나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요컨대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약간 더 긍정적인 이야기―그가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연인과의 이별에서 자신의 잘못이 겉보기만큼 그렇게 크지 않게 보이는 이야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메리 포핀스의 마법 가방처럼 긍정적 착각이 가져다주는 온갖 좋은(마음 깊이 느껴지는 잘 살고 있다는 느낌, 일과 인간관계에서 더 많은 성공, 심지어 더 좋은 신체 건강까지) 이야기들을 찾아 읽는 동안, 어쩌면 내가 개미보다 나을 게 없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느라 아버지가 나를 쓸데없이 헤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 최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라. 순수한 그릿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데이비드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비판받을 때 그 비판의 따가움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혹시 그 믿음직한 방패로 막아내는 데 너무 능숙해져서 비판의 가시가 한 번도 그의 심장에 가닿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그 방패는 그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아내 수전을 잃고 재빨리 또 다른 아내 제시를 얻었다. 물고기 컬렉션을 잃었지만 규모가 더 큰 컬렉션을 재구축했다. 그리고 점점 더 높은 직책으로 승진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 어류학에 대해, 고등교육에 기여한 일에 대해 상들과 메달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델로이 폴허스Delroy Paulhus는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자존감이 높은 학생들에게 끌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그들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마스 차모로-프레무지크Tomas Chamorro-Premuzic는 직장에서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고용 안정성을 더 떨어뜨릴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긍정적 착각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던 한 연구는 그 결과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오류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Michael Dufner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를테면 도구를 빌리거나 파티에 초대받거나 좋은 일자리를 소개받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손해를 보는 게 아니다. 자기기만의 두꺼운 거품벽 안에 있으면 고통이 서서히 축적될 수 있다.

리처드 로빈스Richard Robins와 제니퍼 E. 비어Jennifer E. Beer는 4년에 걸쳐 대학생들을 관찰하면서, 긍정적 착각을 더 많이 하는 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과제에서 실제로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행복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평온 지수는 급감한다는 걸 밝혀냈다.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따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공격적인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이들이며, 이에 대한 증거는 민족주의적 제국주의, ‘지배자 민족’ 이데올로기, 귀족들의 결투, 학교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아이들, 길거리 깡패들의 언어 구사 등에서 볼 수 있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높은 자존감이 모두 나쁜 건 아니라는 점도 재빨리 덧붙였다. 그들은 높은 자존감도 아주 좋은 것일 수 있다며, 활짝 편 손바닥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해명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비판을 받아도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므로 높은 자존감은 당사자를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그들의 표현으로는 “이례적으로 비공격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자존감이 높기는 하지만 자존감에 대한 위협을 쉽게 느끼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위험한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루서 스피어는 이렇게 썼다. “조던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 그는 자신의 관용과 관대함을 자랑스러워했다. (…) 하지만 조던은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9. 세상에서 가장 쓴 것

그가 쓴 책에는 버릴 단어가 전혀 없다. 사람들의 동기나 감정 상태에 관한 극적인 추측은 한마디도 없다. 오직 증거만이 최대한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고, 원자료에서 가져온 긴 인용문들이 담겨 있다. 그 책을 보고 있으면 과거의 목소리들이 독자에게 직접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검시관의 보고서, 목격자의 증언들, 재판 속기록 등 그 모든 걸 들을 수 있다. 그 책이 그렇게 얇은 것은 로버트 커틀러가 미래에 주는 선물, 헛소리를 걸러내고 진실만을 담고자 한 그의 노력의 결과다. 그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인쇄소에 보낸 뒤 책의 초판이 세상에 나온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런 다음 세상을 떠났다.

30년 넘게 의사로 일한 로버트 커틀러가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명확했다. 제인의 증상들과 뱃속과 약병에서 발견된 스트리크닌을 볼 때 제인은 독살당한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인의 사망 이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한 행동들을 추적해본 뒤로는, 데이비드가 독살을 은폐하려 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왜 은폐하려 한 것일까? 대학이 추문에 휩싸이는 걸 막으려고 그런 것일까? 어쩌면 다른 이유들 때문일지도. 로버트 커틀러는 추측을 사실로 단언하지는 않았다.

닷새째 되던 날, 나는 다채로운 색깔의 그림들이 가득한 폴더 하나를 발견했다. 적힌 날짜를 보니 제인이 죽은 지 겨우 1, 2년 뒤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꽃들이 아니라 데이비드가 그린 괴물들이 있었다. 꽃을 그릴 때와 똑같이 힘들여 그렸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색채는 자유분방했다. 염소 머리가 달린 가재, 무지갯빛 가시의 호저, 송곳니에서 자홍색 피를 뚝뚝 흘리는 육식성 캥거루와 아기 주머니 속 육식성 아기 캥거루, 용에 이어서 또 용, 악마에 이어서 또 악마, 넘쳐나는 염소 뿔. 그것들은 불을 뿜고, 피를 뚝뚝 흘리고, 그들의 턱 위로는 인간의 팔다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한 그림에서는 오징어 세 마리가 제 꼬리에 휘감겨 질식되고 있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밤하늘이 흘리는 피가 상어와 늑대, 뱀들에게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림에는 팔자 콧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 무리의 군중 뒤에 서서 자기 옆에 있는 꽃을 꽂은 모자를 쓴 한 여자를 쳐다보고 있다. 그림 속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이 남자에게만 악마의 뿔이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뿔은 그의 머리 위에 희미한 스케치로 그려져 있다. 마치 나중에 추가로 그려 넣은 것처럼

그러다가 430페이지에서, 나는 그것을 보았다. “물고기를 확보하는 방법”이라는 섹션에서, 그는 거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대담한 독자들에게 한 가지 비밀을 누설했다. 조수웅덩이 틈새로 쏜살같이 들어가버리는 탓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방법은 뭘까? 바로 독이다. 구체적으로 그가 추천한 종류는? 언젠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쓴 것”이라고 묘사했던 위험하고 강력한 물질, 바로 스트리크닌이다.

 

10. 진정한 공포의 공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학장으로서 누리던 권력은 제인 스탠퍼드가 사망한 직후부터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책을 하나 쓰기 시작했다. 자선과 호의가 “부적합자 생존”을 초래하는 일이라 믿고, 그러한 자선의 위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경각심을 심어주는 게 그 책을 쓰는 목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인류의 “쇠퇴”를 예방할 유일한 방법은 이 “백치들”10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권고하는 책, 겨우 몇십 년 전에 처음 생겨난 한 단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책이었다.

‘그 단어’는 그가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미국에서 그리 인기가 없는 단어였지만, 그가 지극한 열성과 과학적 권위를 갖고 옹호했던, 그리하여 그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 땅에 널리 보급된 단어, 바로 우생학eugenics이다.

우생학은 1883년 유명한 박식가이자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만든 단어다. 《종의 기원》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골턴은 사촌의 책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아, 그 책을 “내 정신 발달 과정의 신기원”이라고 불렀다. 지구에서 생물의 배열을 결정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그는 인류의 지배자 인종을 선별할 수 있도록 그 힘을 조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요컨대 가난, 범죄, 문맹, “정신박약”, 방탕함 등 그가 혈통과 관련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특징들을 교배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이 기술을 “우생학”이라고 불렀다. “좋은”과 “출생”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조합해 만든 단어다. 그리고 그는 자기―다윈의 사촌인!―말을 들어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얼핏 과학적으로 들리는 ‘유럽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순회 연설을 다닐 때면 데이비드는 교회와 빈민구호소에 꼭 들러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적합자 생존”이라는 위험을 유발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 아오스타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곳을 “갑상선에 혹이 생긴” “천치 같은”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침을 흘리고, 구걸하고, 꼴사나운 행동을 하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언젠가 한 나이든 여자가 “개처럼 내 손을 핥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자기가 거기서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굽은 등에 광기가 번득이는 찡그린 표정을 하고, 치아는 빠져 있고, 사마귀들이 돋아 있는, 지팡이를 짚은 나이 든 여자, 코코넛만 한 크기의 갑상선종으로 목이 부은 남자—을 그린 스케치도 보여주면서, 만약 사회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바로 그런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고 다른 초기 우생학자들도 비슷한 말들을 하고 다닌 이후로, 미국 전역의 뒷골목에서 불임화 수술이 은밀히 행해지고, 때로는 처형까지 자행되었다. 1915년에 해리 헤이젤딘이라는 시카고의 한 의사는 장애가 있는 아기들을 죽게 방치하면서 “검은 황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리노이주의 한 정신병원에서는 결핵균에 감염된 우유를 먹여 의도적으로 환자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웅적인 노력으로, 묻혀 있던 이런 우생학의 역사를 상당 부분 밝혀낸 학자 폴 롬바르도Paul Lombardo에 따르면, 몇몇 의사들이 “부적합한” 환자들을 불임화한 것을 자랑하고 다녔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조용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법적 권한도 없이 은밀하게 수술을 행했다.

내가 받은 전체 교육과정 가운데 이 나라가 우생학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T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 유전적 정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계획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매우 큰 목소리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1910년에 미국변호사협회장은 우생학 불임화를 “야만적”이라고 했고, 오리건주 반불임화연맹 소속 한 변호사는 “폭정과 억압의 엔진”이라고 말했으며, 가톨릭교회는 불임화가 생명의 신성함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1906년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새뮤얼 페니패커는 세계 최초의 강제 불임화법이 될 뻔한 법안을 무산시키면서, “그러한 수술을 허가하는 것은… 주가 보호할 의무를 지닌… 무력한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견의 핵심은 《종의 기원》에 있었다. 어째선지 데이비드와 프랜시스 골턴은 둘 다 그 결정적인 사실을 흘려버렸다. 한 종을 강력하게 만들고, 그 종이 미래까지 지속하게 해주며, 혼돈이 홍수, 가뭄, 해수면 상승, 기온 급변, 경쟁자, 약탈자, 해충의 침략 등 가장 강력한 형태의 타격을 가해올 때도 그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다윈은 무엇을 꼽았을까? 바로 변이다. 행동과 신체의 특징에 변화를 일으키는, 유전자에 생긴 변이 말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 한 종에서 돌연변이와 특이한 존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그 종이 자연의 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들어 위험을 초래한다.
서로 다른 유형 개체 간의 이종교배가 그 자손에게 얼마나 큰 “활력과 번식력”을 만들어주는지, 심지어 완벽하게 자기 복제할 수 있는 벌레들과 식물들까지도 새로운 변이형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유성생식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사실들은 정말로 이상하구나!” 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따금이라도 서로 다른 개체와 교배하는 것이 유리하거나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아주 간단히 설명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전자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라”가 될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

ERO, 바로 그가 창설에 도움을 주었던 그 기관의 과학자들이 연방대법원에 “도덕적 해이”는 피에 부호화되어 있으며 강제 불임화로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증거를 제출한 것이다. 한때 데이비드의 머릿속에 담긴 희미한 아이디어였던 이 관념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으려는 그의 노력을 통해 이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가 되었고, 그 실체는 너무 실질적이어서 이제 곧 연방법으로 지정될 태세였다.

음산한 얼굴의 대법관 아홉 명은 불임화가 범죄와 질병, 가난, 고통에 맞서 시민들을 보호해줄 견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솔깃한 말들과 복잡한 가계도들로 이루어진 증거를 검토했다. 그들은 소심하고 남의 말을 잘 믿는 소녀 캐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첫 재판에서 캐리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 그건 우리 국민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그 사람들은 8대 1의 투표 결과로 “우리가 무능력의 늪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강제 불임화를 법률로 만들었다.

다섯 달 뒤 캐리 벅은 린치버그 수용소에 있는 땅딸막한 벽돌 건물 이층으로 끌려갔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수술하는 의사에게 더 밝은 빛을 비춰주는 그런 방이었다. 캐리는 수술대에 눕혀졌고, 치골 바로 위의 살이 메스로 열렸다. 의사는 탐침으로 나팔관의 위치를 찾아 재빠르게 양쪽 나팔관을 잡아맸다. 그런 다음 잘린 끝부분이 풀리지 않도록 석탄산으로 봉했다.
수술 후 깨어난 캐리는 새로운 현실을 맞이했다. 이제 다시는 그녀만의 독특한 눈과 그녀의 고유한 특징들을 물려받은 아이가 이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일은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었다.

스턴은 한 연구팀과 함께 수년간 그 기록들을 분석했고, “부적합자”란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그 범주 안에서 살아갔는지에 관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스턴의 글에서 알 수 있듯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판단된 젊은 여자들, 멕시코와 이탈리아, 일본 이민자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성적인 전형에서 벗어난 남녀들”이었다. 다른 연구들은 과도하게 치우친 비율로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불임화의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초에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2500명 이상을 강제로 불임화했음을 인정했다.87 노스캐롤라이나 우생학위원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백 명의 흑인 여성들을 찾아내 불임화했다.88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1933년과 1968년 사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여성 중 약 3분의 1이 미국 정부에 의해 불임화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던 판결은 아직도 법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다. 캐리 벅 소송의 대법원 판결은 이후 한 번도 뒤집히지 않았다. 우리가 도달한 가장 높은 발전 단계에서도, 만약 당신이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정부는 당신을 집에서 끌어내 당신의 배를 칼로 긋고 당신의 혈통을 끊어버릴 권리를 지금도 갖고 있는 것이다.

 

11. 사다리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죽는 날까지 열광적인 우생학자로 남았다. 마지막 순간의 깨달음이나 회한을 보여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자기 노력의 결과로 칼질을 당하고 흉터와 수치만 남은 수천 명에 대해서도, 자기 권력을 놓지 않으려 투쟁하는 와중에 짓밟힌 사람들―제인 스탠퍼드, 그에게 명예가 훼손된 의사들, 그가 해고한 스파이, 그에게 성도착자 소리를 들은 사서―에 대해서도.

오싹했다. 그 잔인성과 무자비함이. 그 추락의 무지막지한 깊이와 그 파괴적 광란의 크기가. 토할 것 같았다. 내가 모델로 삼으려 했던 자는 결국 이런 악당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이성도 무시하고 도덕도 무시하고, 자기 방식이 지닌 오류를 직시하라고 호소하는 수천 명의 아우성―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요―도 무시해버린 남자.

데이비드의 정서적 해부도를 쫙 펼쳐놓고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원흉은 그 스스로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던 두툼한 “낙천성의 방패”가 아닌가 싶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2을 지니고 있다고 쓴 루서 스피어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확신과 자기기만과 단호함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 강화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자기 길을 막는 모든 걸 뭉개버릴 수 있다고 믿는 그의 능력은 자신의 길이 진보로 이어질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하게 되면서 몇 배는 더 커졌다.” 데이비드는 공개적으로는 자기기만을 그토록 공격했지만 사적으로는, 특히 시련의 시기에는 더욱더 자기기만에 의존했던 듯하다. 운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의지다. “긍정적 착각은 견제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 그 착각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할 수 있는 사악한 힘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경고한 그 심리학자들의 말이 옳았던 것 같다.

“그가 좀 더 의심하는 마음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하지만 데이비드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예언자가 해준 경고, “일반적으로 과학은 믿음을 싫어한다”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그 사다리에 관한 관념을 고수했다. 결국에는 그 관념을 갉아서 무너뜨렸어야 마땅할 반대 증거들이 파도처럼 몰아닥치는 앞에서도 그는 그걸 꼭 붙잡고 끝내 놓지 않았다.

다윈이 나타나 신의 계획이라는 관념이 허상임을 폭로했을 때, 데이비드는 지구의 피조물들이 우연히 생겨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완벽함의 계층구조에 관한 관념을 유지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썼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시간이라고. 천천히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이 더 적합하고, 더 지적이며, 도덕적으로 더 진화된 생명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자신의 우생학 의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판사와 변호사, 주지사들이 우생학 법률을 폐지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들을 감상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일축했다. 과학자들이 도덕성의 유전 가능성과 퇴화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술한 가정인지 지적하며 우생학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자, 그는 그들의 용기와 사회 개선이라는 대의에 대한 헌신을 의심했다.

하지만 가장 옴짝달싹할 수 없는 논거는 자연 자체에서 온 것일 터다. 데이비드가 자연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따랐다면, 그 역시 그 논거를 보았을 것이다. 눈부시게 깃털을 푸덕거리고 꽥꽥거리고 콸콸 쏟아지는 반대 증거의 무더기 말이다. 동물은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고 가정하는 거의 모든 기준에서 인간보다 더 우수할 수 있다. 까마귀는 우리보다 기억력이 좋고, 침팬지는 우리보다 패턴 인식 능력이 뛰어나며, 개미는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고,8 주혈흡충은 우리보다 일부일처제 비율이 더 높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을 실제로 검토해볼 때,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단 하나의 계층구조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무리해서 곡예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가장 큰 뇌를 갖고 있지도 않고 기억력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빠르지도, 가장 힘이 세지도, 번식력이 가장 좋지도 않다. 같은 배우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도구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심지어 우리는 지구에 가장 새롭게 나타난 생물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10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 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 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 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나를 아름답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자, 이렇게 희망을 놓아버린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할까?
 

12. 민들레

 
애나는 우생학자들이 그녀가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을 인생에서 펼쳐나가고 있다. 애나는 아이스티를 얼음처럼 차갑게 해서 마신다. 화초들에 물을 준다. 색칠을 한다. 페이지마다 가득한 활기찬 동물들을 칠한다. 서핑하는 여우, 카약을 타는 늑대, 줄지어 콩가 라인댄스를 추는 토끼와 달팽이와 나비 등. 그리고 친구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얼마 안 되는 돈을 아껴 모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메리의 아들이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애나는 곧장 밖으로 나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을 샀다. 살아 숨 쉬는, 심장이 뛰는 햄스터 한 마리였다. 메리는 그 햄스터를 보고 감격했다. 메리는 햄스터에게 슈가풋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나에게 자기가 매일 슈가풋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방식을, 우리에서 안아 올려 그 씰룩거리는 작은 볼에 자기 볼을 갖다 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새장 안에서는 미니어처 디스코볼이 돌아가면서 햇빛을 반사해 수십 개의 작은 반짝거림을 방 안에 뿌리고 있었다. 프리티 보이와 프리티 걸이 마치 손뼉을 치는 것처럼 날개를 파드닥거렸다. 아침이 재빨리 흘러가는 동안 모두의 잔에 담긴 얼음 큐브가 딱딱 깨지며 딸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움직임과 빛과 웃음과 따뜻함으로 이루어진 동물원이다. 이 거실은 살아 있다.

그날 그 집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생명을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했던 우생학자들의 믿음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그 생각을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애나의 배에 불거진 흉터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 몸을 내려다볼 때 대법원이 인정한 무가치함의 스탬프가 보이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보랏빛 리본 같은 그 흉터가 사실은 하나의 선물로 의도된 것임을, 아마도 그들이 원한 방식이었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생을 끝까지 살도록 허용해주는 국가의 자비였음을 아는 건 어떤 느낌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내 언니를 보았다면, 아마 언니도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현금출납기 앞에서 허둥대는 사람이니까. 또한 그는 나 역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을것이다. 나의 슬픔은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고, 도덕적 실패의 표시로 여겨졌을 테니까. 숨에서 유황을 내뿜는 인생의 낭비자.

나는 그에게 통쾌하게 반박해줄 말이 있었으면 싶었다. 현란하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줄 방법이. 우리는 중요하다고, 우리는 사실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줄 방법. 그러나 주먹이 올라가는 게 느껴지자마자 내 뇌가 주먹을 다시 잡아당겼다. 왜냐하면 당연히,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 우주의 냉엄한 진실이다. 우리는 작은 티끌들, 깜빡거리듯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우주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정확히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에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폭력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 그럴 순 없다. 명민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호흡, 모든 걸음마다 우리의 사소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죄를 짓고, 거짓을 말하고, 기만과 광기로, 그보다 더 나쁜 것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일이다.
아, 그것은 엉킨 실타래였다.

제 꼬리를 먹는 우로보로스.

복수를 하겠다고 나무로 기어 올라갔지만 높이 뜬 독수리라는 진실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진 파란 꼬리의 스킹크.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심정이었다.
그날 거실에서 애나와 메리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나는 애나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이기적인, 응석받이 같은 질문이었다. 애나가 수용소에 들어간 일, 학대당하고 강간당한 일, 정신지체자 취급을 당한 일, 진흙탕으로 밀쳐진 일, 턱이 부러진 일, 자신의 생식기를 절단당한 일에 관해 듣고 난 다음, 나는 애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계속 살아가시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평생에 걸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다. 그것은 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에 관해 조사하며 여러 해를 보낸 이유였으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던졌던 바로 그 질문이며, 내가 그 곱슬머리 남자를, 차가운 지구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그의 매혹적인 방식을 그토록 놓지 않으려 버텨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경쾌함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가까이하고 싶었던 자질이며, 나의 내면에서도 만들어내고 싶었던 실체이며, 아무리 멀리 아무리 넓게 찾아보아도 나로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비법이었다.

애나도 답을 알지 못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애나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려고 화초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메리가 불쑥 말했다. “나 때문이지!”
애나가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물론이지. 메리 때문이야.”

그것은 농담이었고, 우리 모두를 실수로부터 구해주는 메리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수록, 그 말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그들의 아파트를, 짝을 맞춘 안락의자와 짝을 맞춘 아이스티 잔을 다시 생각했다. 소파에 앉혀둔 인형, 우리 안에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햄스터, 거기 앉아 있을 때는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두 여인 사이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들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빈틈없이 돌보는지, 서로의 슬픔을 찰싹 때려 쫓아버리고, 모든 농담을 재빨리 받아주고,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애나는 여전히 메리를 보살피고 있다. 내게 문을 열어준 사람도 애나였고, 메리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준 사람도, 화초에 물을 주는 사람도 애나였다. 메리가 무릎이 아파 잘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메리와 현재 남자친구인 마이크를 맺어준 사람도 애나였다. 지금은 애나가 체격도 더 작고 겁도 더 많지만, 메리가 이뤄낸 여러 성공들(자식, 손자, 민첩한 유머 감각, 끝없이 이어진 로맨스)을 애나는 갖지 못했지만, 여전히 애나는 메리의 보호자다. 말하자면 지금도 애나는 메리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지구에서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소박한 기쁨들―중력, 아이스티, 햄스터―로 메리에게 설렘과 기쁨을 안겨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메리는 또 어떤가. 거의 모든 말과 반응에서 메리가 얼마나 애나를 고마워하고 있는지가 보인다. 메리는 인형을 사랑하는 친구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랑을 지지해준다. 메리는 인형의 목에 걸린 색색 가지 구슬로 된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내가 만들었어!” 나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조용히 나일론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꿰며, 친구를 위한 깜짝 선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메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메리가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호해준 애나에게 영원히 은혜를 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보답하는 그 행위에서 진짜 의미를 발견했다는 것을.

계속 차를 몰고 가다가 하늘이 어둠으로 통통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그들이 또 다른 증거의 가닥들, 그들의 아파트 벽 너머 훨씬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가닥들도 함께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내게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매달 몇 번씩 찾아와 그들을 위해 저녁을 만들어주고, 공과금 납부를 도와주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일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또 그들에게 거의 매일 웃긴 문자메시지를 보내주는 메리의 양아들 조시에 관해서도. 또 불임화를 당한 데 대해 애나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여러해 동안 싸워오고, 결국 2만5천 달러를 받아내주었으며, 자신의 노력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버틴 마크 볼드라는 변호사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매일 아침 자기 집 발코니에서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이웃 그랜트, 그리고 자신들의 ‘수호천사’라는, 아파트 단지의 접수계원 에버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사이클론이 그들의 집을 부숴놓았을 때 지금의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에버니가 온갖 조치를 취해주었다. 내가 아파트 프런트데스크에서 방문 등록을 할 때 내가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알고 에버니의 눈이 환하게 빛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에버니는 프런트데스크 너머 위쪽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애나의 그림들(졸린 강아지, 얼굴을 붉히는 여우)을 가리켰다. 애나와 메리는 아파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늘 자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아끼지 않는다고 에버니는 말했다. 사실 자기는 그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래도 수많은 불평불만을 들으며 보내는 길고 힘든 하루 중에 마음 따뜻한 그들을 보는 게 얼마나 반가운 휴식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천천히 그것이 초점 속으로 들어왔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이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다정하게 흔들어주는 손, 연필로 그린 스케치, 나일론 실에 꿴 플라스틱 구슬들—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물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내가 우생학자들에 대해 그토록 격노하는 이유다. 그들은 이런 그물망의 가능성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들은 애나와 메리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자신들이 받은 빛을 더욱 환하게 반사할 수 있는 이 실질적인 방식들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메리는 애나가 없었다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 이런 것. 이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 그게 아무 가치가 없다고?
바로 그때 그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렸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깨달음. 애나가 중요하다는, 메리가 중요하다는 말. 혹은 이 책을 읽는 당신(넘어지지 않게 꼭 붙잡으시라)이 중요하다는 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계속 차를 몰면서 나는 이 넓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민들레들이 마침내 이 사실을 이해한 나를 향해 동시에 동작을 맞춰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습을, 운전대 너머에서 내게 손짓을 하고 노란 꽃송이를 흔들며 나를 응원해주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

나는 운전대를 살짝 두드렸다. 운전대에 닿는 내 손가락이 한층 더 가볍게 느껴졌고, 그 손가락이 조종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헤드라이트와 희망을 켠 차를 타고 어디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여전히 똑같은 텅 빈 지평선. 나는 우리의 지배자가 여전히 야멸차고 냉담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저 돌아서는 모퉁이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無라고 확신했다. 약속은 없다. 피난처도없다. 희미한 빛도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든 상관없이.

하지만 그건 내가 아직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맞이한 진짜 결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3.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의 전기작가인 에드워드 맥널 번즈는 그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보다 더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보람 있는 삶을 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그는 미국이 낳은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교육자이자 철학자, 과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탐험가, 평화와 민주주의의 옹호자, 대통령과 외국 정치가들의 조언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산봉우리 하나와 생물학 법칙 하나에 그를 기리는 이름이 붙었다는 점, 그리고 세계 평화 촉진을 위한 가장 훌륭한 교육 안을 내어 2만5천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폭넓게 발휘되었는지 헤아릴 수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 같은 거인들로 구현된 18세기의 위대한 전통 가운데 그가 속한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아, 그리고 그 국제평화상! 알고 보니 데이비드는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고 있던 그의 말년에 세계를 돌며 외교관들에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 일로 만만치 않은 저항에 직면했다. 한번은 연설 도중에 독일의 한 장군이 “그만 됐소!” 하고 명령하는 바람에 중단된 적도 있다.5 그런데 이유가 뭘까? 그는 왜 평화주의라는 인기 없는 대의에 그토록 전념했을까? 데이비드가 판단하기에 전쟁은 한 국가의 가장 훌륭하고 똑똑한 인재를 고갈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형 루퍼스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장 좋은 자질을 지닌 남자들이 싸우러 나가 죽으면 “부적합한” 자들이 남아서 번식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수백 명의 관중을 앞에 두고 말했다. “한 국가가 낳은 최고의 인재들을 파괴하는 일에 내보내면, 차선의 사람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울 것입니다. 약한 자들, 악한 자들, 낭비하는 자들이 번식하고… 나라를 다 차지해버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다.

데이비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인류에게 알려진 물고기(1만2천~1만3천 종)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이 발견한 것이 2500종 이상이라고 추산했다.13 이는 선사시대부터 그의 생애까지, 생명의 나무에 표시된 비늘 덮인 생물들 가운데 거의 5분의 1을 자신과 제자들이 발견해냈다는 뜻이다. 그 물고기들 중 다수가 사실은 그의 우생학 캠페인이 표적으로 삼고 있던 이들—그가 사회에 아무 가치도 없다고 무시했던 이민자들과 “빈민들”—이 발견한 것이라는 사실을 데이비드는 의도적으로 과학적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제시카 조지Jessica George의 최근 연구14에 따르면, 데이비드가 1880년에 태평양 연안을 탐사할 때 이민자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다는 사실, 중국인과 중국계 미국인 어부들이 잡은 가장 좋은 물고기들을 빼앗기 위해 때로는 위협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데이비드 본인도 “꼬마 사내아이”,15 “혼혈아”,16 “포르투갈 소년”17이 자신을 새로운 종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고 잡아주기도 했다고 자주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추산했다. “필자가 최근 일본의 해안가 바위 웅덩이에서 확보한 100가지 이상의 새로운 종 가운데 3분의 2는 모두 일본 소년들이 잡은 것이다. 멕시코 해안의 소년들도 똑같이 솜씨가 좋다.”18 하지만 그는 그 사람들의 공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줄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 그들의 지혜, 그들의 발견은 역사책에 모두 그의 공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그는 포름알데히드와 에탄올에 대한 알레르기 때문에 표본을 다루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의 동료 조지 S. 마이어스는 후에 데이비드가 1885년 이후 물고기를 실제로 측정한 일은 “거의 혹은 전혀” 없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뭐, 그런 건 어쨌거나 크게 상관없었다. 물불 안 가리는 탐험 정신을 지닌 물고기 발견계의 거두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아무 흠 없이 유지되었다. 현대의 어류학자 두 사람이 추정하듯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영향은 너무나 폭넓게 퍼져 있어서 측정하기가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렵다. (…) 북미의 체계 어류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과학적 혹은 지적으로 조던의 후손들이다.”
휴, 한숨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우주적 정의의 감각 같은 건 그 까칠하고 무의미한 조직 속 어디에도 새겨져 있지 않을 만큼 야멸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바닥 모를 혼란한 세계는 소매 속에 또 하나의 속임수를 감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훔쳐갈 마지막 하나 남은 방법을. 이 세계가 마침내 그의 물고기 컬렉션을 단박에 허물어뜨린 그 은근하고 음흉한 방식을. 그것은 번개도 아니고 홍수도 부패도 아니며, 큰 입을 벌려 그 모든 걸 집어삼킨 거대한 싱크홀도 아니다. 아니, 자연의 방법은 훨씬 더 잔인했다. 자연은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하도록 만들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분류학의 기술을 실행하고, 다윈의 충고대로 진화상의 친연성親緣性에 따라 생물을 분류함으로써 작동시킨 그 과정이 치명적인 발견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에 분류학자들이 타당한 생물 범주로서 “어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기학자들은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을 찾는 일에 초점을 맞출 것을 상기시킨다. 한순간이라도 비늘이라는 외피에 시선을 다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걸 밝혀주는 다른 유사점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거라고. 예를 들어 폐어와 소는 둘 다 호흡을 하게 해주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지만 연어에게는 없다. 폐어와 소는 둘 다 후두개(기관氣管을 덮는 작은 덮개 모양의 피부)가 있다. 연어는? 유감스럽게도 후두개가 없다. 그리고 폐어의 심장은 연어의 심장보다는 소의 심장과 구조가 더 비슷하다. 이런 설명들이 계속 이어지며, 마침내 폐어는 연어보다는 소와 더 가깝다는 결론으로 학생들을 이끌어간다.

윤에 따르면, 분기학자들은 사람들이 일단 이 사실—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상한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게 보이기 시작할 거라고 했다.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윤의 설명을 빌리면,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이 한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거나 “시끄러운 모든 포유동물은 한 범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뭐, 원한다면 그런 범주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진화적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자, 만약 당신이 아직도 물고기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타당한 한 집단에 몰아넣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비늘이 있는 폐어들과 실러캔스를 당신 생각에 그들이 당연히 소속된 곳인 물속에 송어와 금붕어와 함께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범주를 “어류”라고 부를 수도 있다! 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공통 조상을 지닌 모든 후손이 함께 포함될 수 있도록 몇몇 다른 생물들도 어류라는 집단에 집어넣어야 한다.

물가에 걸터앉아 있는 개구리들은 어떨까? 그 개구리들도 발로 차서 같은 물속에 집어넣어라.
저 하늘 높이 나는 새들은? 그 새들도 물에 빠뜨려라.
소들은? 물론 소들도 들어간다.
당신의 엄마는? 당연히 어류다.

어떤가. 그럴듯한가? 그렇지 않다면, 과학적으로 좀 더 논리적인 일은 어류란 내내 우리의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류”라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비드에게 너무나도 소중했던 그 생물의 범주, 그가 역경의 시간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범주, 그가 명료히 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그 범주는 결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맞아요. 직관에 어긋납니다!” 자칭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인 릭 윈터바텀Rick Winterbottom이 내게 한 말이다. 그도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학생들에게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려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관념이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기가 대적하기에 너무 센 적수를 상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워했다. 그 센 적수는 바로 직관이다. 그는 사람들이 결코 편안함을 진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캐럴 계숙 윤에게 어류를 놓아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캐럴은 이렇게 썼다.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걸 보는 일, 아니 사실 내가 미숙하고 젊은 대학원생 시절부터 강의실에서, 세미나실에서, 연구실에서, 과학 학회에서, 조용한 복도에서 계속 반복해서 해왔듯이 물고기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각별히 고통스러웠다. 어류의 죽음을 뒷받침하는 과학이 옳다는 걸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그건 언제나 얼마간 아픔을 안겼다. (…) 잔인할 정도로 깔끔한 분기학의 논리를 따라갈 때면, 나는 종종 어떤 식으로든 속임수에 넘어간 느낌, 누군가의 능란한 술책에 농락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게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앗, 잠깐! 당신 지금 어떻게 한 거야? 물고기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눈속임이 아니다. 그것은 적나라하고 엄연한 진실이다.

이 글에서 느껴지는 윤의 고통이, 윤이 물고기를 잃은 “잔인한” 경험이 나에게는 무척 소중했다. 내가 윤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대리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를 알고, 해부용 메스가 자신에게 생물들 사이의 “진실한 관계들”을 보여줄 거라던 그의 믿음을 알기에, 나는 그도 결국에는 물고기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물고기에게서 어떻게 위안을 얻고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알고 있으므로, 그에게도 그 일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아픔을, 어느 정도는 고뇌를 느낄 그를 상상해보는 일… 그것은 나에게 경이로운 효과를 발휘했다. 그 상상은 무신론자에게는 가장 금기시되는 판타지로 내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밖, 혼돈의 차가운 수학 속에 결국 일종의 우주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판타지 말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횡설수설하는 분기학자” 릭 윈터바텀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목적을 얻었다. 그는 하나의 대의를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덮고 있는 두꺼운 모포를 걷어내려는 열의에 불타올라, 이 칠판 저 칠판 위에서 이 물고기 저 물고기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뇌를 재배선하고 있다고, 자신이 진실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도 그 문틈을 엿보도록 돕고 싶은 열의를 느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열의가 식고 시무룩해졌다. 그 새로운 비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너무 적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확신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음, 30년 동안 계속해온 전투였어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지금은 대신 애꿎은 골프공에 화풀이를 하고 있죠. 나의 새로운 야심은 숲과 호수의 바닥을 작고 하얀 구체들로 쫙 깔아버리는 거예요. (…) 내가 그 일은 꽤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철학자 트렌턴 메릭스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는 그의 화살통 속 화살의 수만 하나 늘었을 뿐이다. “내겐 그리 충격적이지 않네요.” 내가 어류의 범주가 해체된 일에 관해 숨 가쁘게 설명하고 나자 그가 한 말이다. 그것은 정확히 그가 자기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생태학자 조너선 밸컴Jonathan Balcombe이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유전적 연구를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개념은 자신이 관찰한 사실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그는 한 점으로 수렴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그는 《물고기는 알고 있다: 물속에 사는 우리 사촌들의 사생활What a Fish Knows: The Inner Lives of Our Underwater Cousins》이라는 책을 써서, 물고기들의 인지가 얼마나 폭넓고 복잡한지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색을 보며, 특정한 기억 과제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도구를 사용하며, 바흐의 음악과 블루스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종들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나는 그에게 농담하듯 물었다. “하, 이제 모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선 먹기를 그만둬야 하나요?” 그러자 그가 “예”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지, 그러니까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그 생물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인지적으로 훨씬 복잡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동의한다.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에모리대학의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것 말이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인지 과제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다면—예를 들어 특정한 새 종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그들은 그것을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언어적 수법을 드 발은 “언어적 거세”라고 표현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큰언니는 물고기를 놓아버리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언니는 어류라는 범주 전체를 바로 손에서 놓아버렸다. 왜 언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인간은 원래 곧잘 틀리잖아.” 언니는 평생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늘 반복적으로 오해해왔다고 말했다. 의사들에게서는 오진을 받고, 급우들과 이웃들, 부모, 나에게서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정말로 이 물음은 모든 사람마다 다 다르다.

 

에필로그

 
내가 물고기를 포기하면 얻게 되는 게 뭔지 나는 아직 몰랐다.

다만 시카고를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았다.

더 이상 나의 연옥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헤더의 아파트에, 곱슬머리 남자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거라는 헤더의 믿음이 따뜻하게 덥혀주던 그 2층짜리 둥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지더라도,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아가야 했고, 혼돈 속으로 다시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봐야 했다.

내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나의 확실성을—그러니까 나의 테디베어를—꼭 붙잡고 있고, 원망은 늘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나의 두려움은 늘 빵빵하게 차 있고, 지구는 납작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나는, 이를테면 인체에서 “사이질interstitium”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그리고 나도 다윈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긴다. 우리의 가정들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 관해 궁금해해야 한다는 것을. 그 볼품없는 박테리아는 어쩌면 당신이 숨 쉬는 데 필요한 산소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그 단단한 가장자리에서 마지못해 뛰어내리게 했던 실연은 결국 더 좋은 짝을 찾게 해준 선물로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꿈들까지도 검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희망까지도… 어느 정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긍정적 환상을 갖는 것이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나는 서서히,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터널 시야 바깥에 훨씬 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믿게 됐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해골 열쇠를 하나 얻었다. 이 세계의 규칙들이라는 격자를 부수고 더 거침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물고기 모양의 해골 열쇠.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

그 열쇠를 돌리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잘못 알고 있을까? 과학자의 딸인 나로서는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가 물고기를 포기할 때 나는 과학 자체에도 오류가 있음을 깨닫는다. 과학은 늘 내가 생각해왔던 것처럼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질서”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르디넴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 단어들을 타이핑하고 잠시 뒤에 우리가 사는 마을,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급습했다. 그들은 우리 집 앞 진입로에 깔아놓은 자갈들 위로 차를 세웠다. 멋 부린 헤어스타일에 나치 표지를 단 방패를 든 그들은 남부연맹군 지도자의 동상 하나를 지키려고 공원으로 돌진했다. 그들은 시위자 군중을 향해 차를 몰아, 한 사람을 죽이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그들의 부츠와 그들의 구호와 그들의 신념으로 한 흑인 남자를 피가 나도록 구타했다.

그 일이 다 끝난 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라디오에 출연했다. 그는 목숨을 앗아간 데 대해서는 유감을 표했지만, 자신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백인은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그것은 “그냥 과학의 문제”라고 그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무 문제 될 것 없다는 투로.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변화에 관한 몇 마디

 
이 책이 출간되고 여섯 달 뒤,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름이 붙은 건물의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두 학교 모두 학생들과 임직원, 교직원, 졸업생들이 편지와 기사, 온·오프라인 시위로 항의한 결과 내려진 결정이다.

 

감사의 말

 


 
 
이 글은 인간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와 그 허구성을 탐구하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를 통해 '질서'라는 개념에 집착한 인간의 노력과 그로 인한 도덕적ㆍ과학적 오만을 비판합니다.

조던은 과학적 탐구로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으나, 그가 창조한 질서(어류의 분류)는 결국 허구임이 밝혀집니다. 그의 질서에 대한 집착은 우생학 같은 위험한 사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저자는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을 이해하면서도, 범주화와 확신이 때로는 족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대신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혼돈을 인정하며 열린 태도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연에는 도덕적 위계질서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인간이 만든 인위적 경계와 범주를 해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이러한 경계의 해체를 상징하는 강력한 은유입니다.


[강대호의 책이야기] 겉모습에 미혹되지 말라...‘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오피니언뉴스

[강대호 칼럼니스트] 은유가 담겼다고 생각했지만, 직관적인 제목이었다. 다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 그랬다. 영어 제목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Why fish don’t exist)’라며 저자의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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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에 미혹되지 말라...‘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은유가 담겼다고 생각했지만, 직관적인 제목이었다. 다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이 그랬다. 영어 제목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Why fish don’t exist)’라며 저자의 집필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 ‘룰루 밀러’는 어류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 Jordan)’의 삶을 추적한다. 이 책은 유명한 생물학자의 업적을 기록한 평전이면서, 이 과학자의 실체를 밝히며 성찰하는 저자의 성장기를 담고 있다. 또한 과학의 이름으로 인류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오류의 역사를 바로잡아주려는 소망을 품고도 있다.

숨어있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사랑한 과학자

19세기 중반 미국 뉴욕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린 시절에 별을 사랑했다. 그래서 자기 이름에 별(star)을 넣었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보잘것없는 것'에 몰두하는 어린 시절을 보낸 데이비드는 생물학자가 되었다.

데이비드는 어류 분류학자다. 그가 활동한 당대에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1/5을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했다. 발견했다는 건 이름을 붙였다는 걸 의미한다. ‘아고노말루스 요르다니(Agonomalus Jordani) 같은 라틴어 학명으로. 일본 연안에서 발견한 어느 ’날개줄고기‘에 데이비드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붙인 것처럼.
천여 종의 물고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것에서 보듯 데이비드는 물고기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다. 이런 명성 덕분에 1891년, 데이비드는 갓 마흔에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학교 설립자 부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그는 물고기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하지만 1906년 4월 어느 날 “지구가 어깨를 들썩였다.” 샌프란시코에 대지진이 닥친 것.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들이 무너졌다. 데이비드가 평생 수집해온 물고기들을 담아둔 유리병들도 박살이 났다. 표본이었던 물고기들이 깨진 유리병 조각에 찢기기도 했지만, 그 유리병에 물고기와 함께 담아뒀던 이름표들도 깨진 유리병 조각들과 함께 흩어져버렸다.
그러니까 데이비드가 평생 연구해온 기초 자료가 산산이 흩어진 것. 그 순간 데이비드는, 저자 룰루 밀러가 그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게 한 행동을 한다. 바늘을 꺼내 물고기의 목구멍을 향해 찔러 넣었다. 데이비드는 평생의 업적이 산산조각이 난 그 상황에서 물고기 표본에다 이름표를 꿰매 붙이기 시작했다. 유리병이 깨져도 물고기와 이름표는 헤어지지 못하도록.

자연에 계층 사다리가 있다고 믿은 우생학자

좌절의 순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이비드에게 저자 룰루 밀러는 호기심과 함께 존경심을 느꼈지만, 인간으로서, 과학자로서의 그의 삶에는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가 물고기 표본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유색 인종 어부들의 그물을 빼앗기도 하고, 물에다 독을 뿌리는 등 도덕적으로 비판 받을 만행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독을 연구에 활용한 데이비드는 심지어 그의 학사 운영 관행에 반대하는 학교 설립자를 독살했다는, 최소한 의문사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도 데이비드는 말년에 특정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큰 자취를 남긴다. 바로 우생학,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살시키는' 데에 일조한 그런 분야에서.

데이비드는 어류를 연구하면서 고등생물과 하등생물, 즉 자연에 계층적 사다리가 존재한다고 믿게 된 걸로 보인다. 그 기준과 척도는 인간에게도 적용되었다. '적격자와 부적합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차세계대전 시절 평화를 부르짖고 다녔다. 미국의 참전을 반대한 것. 그 이유는 가장 좋은 자질을 지닌 남자들이 싸우러 나가 죽으면 ‘부적합한’ 자들이 남아서 번식을 이어간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데이비드는 자신의 우생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평화주의자가 된 것이었다.

특정 인간들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고 믿었던 데이비드에 대해 저자는 정작 데이비드 본인의 생각이 오염된 건 몰랐다며 그 오염의 증거를 책 곳곳에서 밝힌다. 또한 나치와 싸웠던 미국이, 비교적 최근까지 정책적으로 우생학을 옹호한 역사를, 사회적 약자를 강제로 격리하고 불임시술을 한 사실을, 희생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고발하기도 한다.

외면 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봐야

저자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다. 룰루는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이 세상은 우주의 한 점 먼지보다 작고, 인간은 그 한 점 먼지 속에 사는 미세한 존재일 뿐이라는, 그러니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조언을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룰루에게 아버지의 가르침은 전혀 와 닫지 않는, 알고는 있지만 믿기지는 않는 과학적 수사일 뿐이었다. 인간관계가 주는 좌절감에서 허우적거리던 룰루 밀러는 오히려 인간의 존재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데이비드의 회복력에 호기심이 갔다. 어떻게 대지진으로 평생의 업적이 산산조각이 난 좌절의 순간에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달려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룰루는 다양한 자료를 뒤지며 데이비드의 삶을 추적하다가 그가 '악당'이었단 것을 알게 되고, 삶의 모델로 삼고 싶었던 데이비드의 잔인성과 무자비함에 오싹함까지 느끼게 된다. 룰루가 데이비드 행위에 대해 통쾌하게 반박해줄 말을 찾아 나선 이유다.

그 결과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어류'로 분류되는 생물은 세상에 없다는 것. 룰루는 ‘캐럴 계숙 윤(Carol Kaesuk Yoon)’이라는 아마도 한국계 과학자가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Naming Nature)>라는 책을 읽은 후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세상에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물에 사는 생물이라고 해서, 비슷한 패턴의 피부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이들을 어류라는 한 종류의 생물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캐럴 계숙 윤’과 그가 인용한 분기학(cladistics)에 따르면 우리가 통칭 어류로 부르는 물속 생물들은 다양한 해부학적 특성을 가진 여러 종류라고 한다. 즉, 어류라는, 하나의, 최상위의 생물 종류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어류라는 생물은 원래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주장은 데이비드가 평생 천착해 왔던 어류 분류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저자가 인터뷰한 과학자들도 분기학자들의 어류에 관한 주장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과학자로서 업적과 인간으로서 면모가 재평가되고 있다며 룰루는 책을 마무리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2021년 연말 한국에서 출판돼 2022년 서서히 입소문이 나더니 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 종합 상위권에 오른 책이었다. 지금도 대형서점의 과학 서적 부문에서 상위권에 있다.

이 책의 어떤 특별한 점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을까. 아마도 과학 이야기를 유려한 문체로 담은 글의 힘에 있을 것이다. 그에 더해 '연대의 그물망'이 인류를 발전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는, 또한 '민들레의 법칙', 민들레가 누군가에게는 잡초일 뿐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약초나 물감처럼 널리 이롭게 쓰인다는 저자의 메시지가 따뜻한 위로를 준 건 아닐까.
무엇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겉모습에 미혹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급’이 나뉘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는 걸 떠올리게도.

그걸 어떻게 옮길까 하는 고민에는 그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1년 더 하면 되지🎸
2025년 연말을 기다려요🎅🏻
🛸
집나가면 개고생이야..🥶
이거...심심하거나 궁금한데 모르니까 답답해서..나도 모르게 하고 있어...또 재미있달까...





p.s. 바우마이스터와 부시먼은 이렇게 썼다.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판당하기 싫다면 거창한 자기상에 숨지 않고 실제 자신의 모습을 동일하게 하거나 고취시키면 되는 일이다.
혹은 거창한 자기상을 지우는 것이다.

겸손은 자신을 있는 모습 보다 낮추는 것이 아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른 생물 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유연성을 가지지 않는 자는 집단지성의 오류 즉 우생학을 주장하는 자에게 휩쓸리기 쉬운 존재로 간주되며 인간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다. 혹은 당신의 목숨에 위협을 가할지도 모른다. 적합성의 관점을 인용하면 당신이 일종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인간에게 당신은 개미보다 나은가? 코로나 때를 떠올려 보라 당신이 어떻게 생긴 게 어떤 지위인 게 중요한가? 그저 어디 가두어둬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을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건 데이비드에 동의 :)



이게 내가 멍청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을 받아드릴 용기 조차 없다. (내 주변에 얼씬도 안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