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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의 생애

코로네 2024. 6. 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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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三峰) 정도전의 생애 요약

정도전의 생애     이성계가 군사적 기반만을 바탕으로 조선을 창업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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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군사적 기반만을 바탕으로 조선을 창업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 말기 충렬왕 때 안향(安珦) 등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수용되었던 성리학은 정치 사회적 변화를 갈구하였던 당대의 유학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성리학을 수용한 이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말의 개혁과 변화에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특히 신진사대부 가운데 정도전은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데 있어 1등 공신이었을 뿐 아니라 사상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서 조선의 창업에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여말선초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의 정도전의 생애를 요약한 글을 읽는다면 역성혁명이 벌어지고 사상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대의 격변기 '여말선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대적 격동기를 말한다.

 



 

出世(출세) - ‘1342~1374’

 

정도전은 정운경의 3남1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태조 5년(1396), 명나라와의 외교문서 ‘표전문’이 말썽이 되어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는 압력을 조선이 받았을 때, 정도전은 자신의 나이가 이미 55세가 되어 명나라에 갈 처지가 못 된다고 말한 일로 출생연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말이 정확하다면, 정도전의 출생 연도는 1342년(충혜왕 복위 3)이 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했던 정도전은 정몽주 등과 함께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 높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9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에는 성균시(成均試), 21세 되던 1362년에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며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정도전은 충주의 사록을 거쳐 1364년에는 개경으로 돌아와 전주교부가 되었고, 1365년에는 왕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통례문지후(정7품)로 승진하였다.

  • 그러나 이 시기 신돈이 국정에 간여하자, 정도전은 이에 실망하여 낙향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공민왕이 유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성균관을 개혁하고. 정도전의 스승이었던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제자들이었던 정몽주 등이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이색의 문하로 친분이 깊었던 정도전은 교관들의 천거를 받아 성균박사(정7품)에 임명되었다. 이후 5년간 학관을 겸직하며 매일같이 성리학에 관해 토론한 것이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뛰어난 성리학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流配 ․ 流浪 (유배 ․ 유랑) - ‘1375~1383’

 

비교적 순탄한 출세길을 걸어왔던 정도전에게 암운이 닥친 것은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면서부터다.

 

우왕이 즉위하고 이인임 등 권문세족이 득세하면서 ‘친원반명(親元反明)’의 외교정책을 취하자 이를 반대했던 정도전은 1375년 북원의 사신을 접대하는 문제로 친원파 권신들의 노여움을 사 1375년(우왕 원년) 여름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에 속한 거평부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3년간 나주의 거평부곡에서 귀양생활을 하였던 정도전은 1377년 그의 고향인 영주(榮州)로 예사(例徙)하였고, 다시 종편(從便)으로 완화되어 거주지를 자신이 고를 수 있게 되었다.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었던 정도전은 개경 부근으로 올라와 삼각산 밑의 옛집으로 돌아왔지만, 이곳 출신의 재상이 정도전을 미워하여 집을 헐어버렸다. 할 수 없이 정도전은 당시 가르치던 제자들과 함께 부평부의 남촌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만들기 위해 정도전의 집을 헐어버려, 그는 다시 김포로 이동하게 되었다.

 

9년간의 유배 · 유랑 생활은 정도전에게 너무도 길고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는 초라한 농가에서 스스로 밭갈이를 하며 식량을 조달하였고, 때로는 농민과 친구의 집에서 걸식을 하였다. 정도전이 이 시기 경제적 빈궁과 정신적 고독감이라는 시련을 겪음과 함께 거친 들판에서 백성들과 접촉하며 민심을 확인하였던 것은 그가 개혁사상을 완성하는데 자극제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革命(혁명) - ‘1383~1392’

정도전의 나이 42세가 되었던 1383년, 그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 함주(咸州)로 떠난다.

 

그가 이성계를 찾은 것은 혁명을 모의하기 위함이었고, 아직 역성혁명을 생각하고 있지 않던 이성계를 설득해 의기투합하게 된다. 1384년(우왕 10)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도전은 전의부령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의 금릉에 다녀왔다. 이듬해 성균좨주 · 지제교로 승진하였고 1387년 남양부사를 거쳐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에 올랐다.

 

1388년(우왕 14) 고려의 역사를 바꿔놓은 위화도 회군이 벌어져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정도전은 왕의 비서직인 밀직부사(종2품)에 임명되었고,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과정에서 은사였던 이색과 의견이 갈렸고, 전제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학우이자 동지였던 정몽주와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였다.

 

1389년(창왕 원년)에는 이성계 · 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 · 창 부자를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세워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정도전은 봉화현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재정을 관장하는 삼사우사로 승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정월 정도전은 경연관으로서 관리등용을 공정하게 할 방법과 첨설직의 혁파를 진언하였고, 6월에는 정당문학(종2품)으로 승진하여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 · 이초의 무고 사건을 해명하고 돌아왔다. 그 후 정도전은 다시 동판도평의사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직하며 문관의 요직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1391년에는 종래의 5군제도가 혁파되고 삼군도초제부가 신설되자 우군총제사에 임명되어 군사권까지 장악하였다.

 

군사권을 장악한 뒤 정도전은 본격적으로 개혁반대세력을 몰아내게 된다. 왕이 연복사탑전을 중영하는 것을 계기로 성균관학생들과 함께 배불 상소를 올려 불교배척의 봉화를 드는 한편, 이색과 우현보 등을 우 · 창 옹립의 죄를 들어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반혁명파를 몰아내기 위함으로 명분이 어찌되었든 상대세력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1391년 9월, 정도전은 보수파에 속하는 대사헌 김주와 형조의 탄핵에 의해, 처음에는 평양부윤으로 보내졌다가 이후 관직을 삭탈당한 뒤 봉화 · 나주로 유배당했다.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지만 이해 4월 이성계의 낙마사고를 계기로 반혁명파의 탄핵을 받고 보주의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반혁명파의 거센 역습은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6월 정도전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충의군에 봉해졌고, 7월에는 조준 ·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되었다.

 

創業(창업) - ‘1392~1398’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최초로 선포한 개혁사업을 정도전이 지었다는 것은 그가 왕조의 설계자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아울러 이 교지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반혁명세력에 대한 처벌도 언급했다.

 

정도전은 이어 개국 1등공신으로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요직을 겸함으로써 조준 · 남은과 더불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이후 그는 계품사 및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며 요동을 살폈으며, 1393년(태조 2)에는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했다. 이해 정도전은 국가재정을 관리하는 판삼사사(종1품)에 임명되었고, 11월에는 절제사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을 골라 진도(陳圖)를 가르쳤다.

  • 이는 정도전이 병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1394년(태조 3) 정도전은 판의홍삼군부사가 되어 최고의 병권을 장악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 정비에 참여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치는 등 치국의 지도이념을 재정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도 건설에 참획하여 신궁제전(新宫諸殿)의 명칭을 찬진(撰進)하는 등 왕조창업에 따른 문물제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

 

1396년(태조 5) 이후 정도전은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문제가 되어 시련을 겪는다. 이는 명나라가 정도전이 일찍부터 추진하던 요동정벌운동에 불안을 느껴 그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정도전은 판삼사사에서 물러나 봉화백에 봉해졌으나, 명의 요구에 응하지는 않았다. 이후 정도전은 요동정벌운동을 적극화하여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남은 등과 함께 요동을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때 같이 이성계를 옹립하며 역성혁명을 주도하였던 조준이 정벌을 반대해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1398년(태조 7) 3월 함경도 지방을 정비하고 돌아온 정도전을 위해 태조가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남은은 도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으로 합칠 것을 간하였고, 이에 따라 사병이 혁파되고 왕의 군사장악권이 강해졌다.

  • 이는 요동정벌을 위한 작업이기도 했으나 왕자와 공신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지휘권 역시 박탈함으로서 권력투쟁에 있어 정도전 일파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사병혁파로 궁지에 몰려있던 이방원 일파가 이해 8월 종친을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일시에 정도전 일파를 기습하여 정도전은 참살당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