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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 성숙의 마지막 단계, 위버멘쉬(Übermensch)

코로네 2024. 7. 21. 08:25


위버멘쉬 (독일어: Übermensch / 영어: Overman)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삶의 목표로 제시한 인간상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긍정할 줄 알아서 고통마저도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외부의 힘이나 절대자에게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니체는 인간이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야 된다고 말했지, 매번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의 밧줄 위에서 위버멘쉬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즉, 삶이 무기력해서 그 권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필요가 있을 때 그 '나아감'이 본능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 인간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 이 말은 자신의 행복 추구를 위해 그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위버멘쉬는 자신이 세운 가치관에 의해 스스로 몰락하는 자다.
동정에 기반을 둔 기존 도덕의 선악과 출발점이 다를 뿐 위버멘쉬는 자신을 제어하는 '자신만의' 엄격한 가치관을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다.

위버멘쉬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그는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남에게 아첨하는 인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모든 이를 경멸한다.

다시 말해, 위버멘쉬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제어하는 크고 작은 자기 긍정의 엄격함으로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 더 나아가 삶의 필연적인 면마저 어리숙하게라도 춤추고 노래하고 웃는 것으로써 극복할 줄 아는 건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국어로는 초인(超人)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니체가 가리키는 바는 '물리적ㆍ물질적인 힘'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그 '창조적인 힘'으로 끊임없이 몰아치는 가혹한 삶의 고통과 허무를 매번 노래하고 춤추는 마음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즉, 삶이 가혹하다고 해서 이상적인 종교나 도덕, 이념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혹하고 불합리한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삶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 심지어 그 고통을 기꺼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자극제로 삼으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 그대로 힘이 센 초능력자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초인'이라는 번역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최근에는 아예 원어 발음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번역하는 추세이다.

 

인간 성숙의 3단계

 

 니체, 정신 3단계란?

니체가 말하는 정신의 세 단계는 '낙타'의 정신, '사자'의 정신, '아이'의 정신이 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낙타 떼들의 노예근성을 빗댄 표현이다.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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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 낙타


낙타는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낙타 떼들의 노예근성을 빗댄 표현이다.

낙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기존 사회 체계를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스레 받아들이면서 타성에 젖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좋은 대학도 졸업했고 예쁜 여자와 결혼했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부도 이뤘지만 이 삶이 행복하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행복의 조건은 자기 스스로가 설정한 가치에 따라서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 한마디로 낙타의 삶은 복종의 주체를 상징한다.

 

2단계: 사자


사자는 '자유의지의 주체'로, 자신이 믿지 않는 것, 자신이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는 존재다.

즉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전체의 일부로서의 하나가 아닌 고유한 주체로서의 내가 되기를 지향한다. 또 자기가 쟁취하고 싶은 것을 쟁취해내고자 하는 존재이다.

  • 한마디로 힘의 의지를 가지고 사는 삶이다.


그런데 사자의 삶에도 한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와 꿈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자는 이미 너무 강하고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는 기존의 권력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니체가 서양의 이분법적 관념론과 기독교의 내세관을 망치로 때려 부순 것처럼 치열한 싸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이렇게 기존 체제와의 거듭된 싸움으로 인한 상처를 감당해야 하는 삶이다.


3단계: 어린아이


정신 3단계는 이런 싸움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지혜로 세상을 놀이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어린아이의 정신이다. 당면한 현재의 문제점을 잠자코 따르지만도, 그렇다고 거세게 저항하지만도 말고 재밌는 '놀이'로서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문제점이 무력화되고 남들에게 고통을 주려하는 이들을 오히려 당황시킬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남사당패처럼  임금을 가지고 노는 풍자와 해학이라면 어린아이의 단계의 최고봉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아이의 정신'을 갖게 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양치기나 사람이 아닌, '변신'한 자, 빛으로 감싸인 자가 되어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그와 같이 웃어본 자는 없었다."

결국 어린아이의 단계는 힘과 힘으로 맞붙는 삶이 아니라 한 발 물러나서 상대방의 힘을 빼는 어린아이 같은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 같다.

이런 경지라면 참으로 어려운 경지이기도 한데 어떻게 보면 쉬운 경지라는 생각도 든다.



 


p.s. 몸은 어른이지만 정신 성숙은 낙타와 사자에 머물러있는 자들은 어린아이가 존경할 대상이 아니다.